작품소개
예상할 수 없는 희망과 준비할 수 없는 절망,
불확실함에 갇힌 불안을 마주하는 자세,
명학수의 세번째 소설집
"그건 그냥 일종의 예의 같은 거야. 모성이라든가, 그렇게 거창한 건 절대 아니고,
그저 나를 찾아준 고마운 손님에 대한 예의."
"엉망인지 어떻게 아느냐고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요? 다들 알잖아요.
알면서 모른 척하는 거죠."
?2024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 소설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한 작가는 소설집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등을 발표하며 "불안을 섬세하게, 과장하거나 섣불리 봉합하지 않으면서 바라보는"(소설가 이기호) 작가라는 평을 받았다. 두 편을 모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작가는 "사뭇 진지한 문체로, 겉으로 말하지 못한 불확실함과 불안을 능히 숨"기며(「해설」) 불안을 좇는다. 에둘러 풀어내는 서사는 독자에게 작가가 주시한 불안을 서서히 마주하게 하며 무탈에 대한 소망을 함께 기도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든다.
이미 지나온 길로 돌아가고 싶지 않다. 나는 한번도 가보지 않은 방향으로 걸음을 뗀다. 마치 파란만장한 서사의 당연한 결말처럼. _「작가의 말」에서
두 편의 텍스트가 형상화하는 세계가 임신과 방화라는 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치명상도 없이 무던하게 유지되는 이유는 명학수의 인물들이 세계의 파괴자가 아니라 동조자(sympathizer)이기 때문이다. _「해설」에서
불확실의 그늘, 불안
「손님」은 생각도 못한 임신 앞에 놓인 커플의 불안을 그린다. 재택으로 출판사 외주 일을 하는 해미와 남에게 인정받을 만한 배역 한번 못해본 5년 차 연극배우 나는 "단지 사랑"하기 때문에 동거를 선택한다. 임신과 출산은 그들의 관심사가 아니었으나 어느 날 그들에게 손님이 찾아든다. 고등학교 때부터 우울과 불안에 시달렸던 해미는 원하는 문예창작과 진학했음에도 상황은 나아지지 않고 부의 폭력에 무너지며 정신병원에 입원을 결정할 만큼 극단의 모습까지 보였다. 오랜 시간 우울증을 앓았고 정신과 약물까지 복용해온 해미는 좋은 엄마는 자신에게는 가능하지 않은 자리라는 생각에 다니던 정신과에서 임신 중지에 필요한 소견서를 받아들고 나온다. 심한 입덧으로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해미를 데리고 나는 이 음식점 저 음식점 돌아다니며 그녀의 불안을 함께한다. 해미는 "우리가 원하지 않는 길로 들어섰"고 "문제는 이 길의 끝에 무엇이 있는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이별을 통보한다. 하지만 나는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고 "지나치다 싶을 만큼 차분"한 말투로 거절한다. 그리고 우는 그녀 앞에 냅킨을 놓아준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 안에 무엇이 있는지. 그래픽이나 초음파 사진과는 다른 실감을, 과학으로 아무리 정밀하게 들여다보아도 알 수 없는 그 너머의 존재감"을 확인하고 싶어진다. 해미의 배 위에 손을 얹는다.
"편안해."
그걸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이 세상의 언어로는 설명되지 않는 느낌이 존재한다는 걸 나는 그때 처음 알았다. 감정이나 느낌이 아닐 수도 있다. 어쩌면 아무것도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_「손님」에서
「밤의 가스파르」에서 9급 지방직 공무원 교육행정직인 홍주는 남자고등학교의 교육행정실에서 근무한다. 공문을 확인해 전달하고 새로 올라온 구매 요청을 확인해 주문하고 품목과 수량과 금액을 신중하게 처리하는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가 해도 상관없는 일"을 매일 반복한다. "생산성, 가치, 보람"보다는 "일을 위한 일"들이다. 그러던 어느 날 학교도서관의 "문제의 심각성을 지적하고 개선을 요구"하는 무리가 생긴다. 그들은 "여러 고등학교와 시청과 교육청에 지속적으로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한다. 그들의 여러 요구 중에 행정실 직원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아직도 30년 전에 출판된 세계문학전집이 서고에 꽂혀 있다거나 책의 종류도 너무 한정적이라는 등의 지적보다 "기본 운영비 중에서 3퍼센트 이상은 자료구입비로 지출하라는 게 교육부 권고 사항인데, 그거 지키는 학교 없"으니 "당장 감사"하라는 항의다. 행정실장은 "우리 업무 아니니까 교무실로 연락하도록 똑 부러지게 전달하라"는 대응책을 내놓는다. 홍주는 도서관 형광등을 교체해달라는 한 학생의 요구를 받고 도서관을 찾는다. 도서관에서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는 학생은 전문 사서 선생님이 언제 오시는지를 묻는다. 홍주로서는 아는 바도 없고 권한도 없는 질문이다. 전기를 아끼라며 접수대만 불을 켜라는 학교의 지침에 따라 학생은 접수대만 불을 켜고 앉아 책을 읽는다. 차석은 급식에 나오는 김치의 맛이 영 이상하다며 중국산을 섞는 게 아닌지 의심하고, 교무부장은 이번에 새로 대량 구매한 수성펜의 필기감이 왜 이 모양이냐고 화이트보드 위에 써 보이며 불만을 늘어놓고, 양 선생님은 "입 닫고 눈감고 귀 막고 할 일만 하"는 자신의 장기근속의 비결을 말해주며 딸기맛 사탕을 건네는 일상이 이어진다.
그리고 며칠 후 학교도서관에 불을 지르겠다는 전화가 온다. 학교의 해결책은 도서관에 비치할 소화기 두 대. 그들의 전화는 다음날에도 온다. 그 다음날에도 오고, 또 그 다음날에도, 매일 계속 걸려온다. 그들이 주장하는 내용은 똑같다. "당신들은 구제불능이다. 그러니 벌을 받아 마땅하다. 곧 불을 지르겠다." 홍주는 전화를 피한다. 통화를 하면 그들을 야단치며 화를 낼 것 같다. 홍주는 그러고 싶지 않다. 홍주가 소화기를 들고 도서관은 찾았을 때 여전히 그곳에서 『밤의 가스파르』을 읽고 있는 남학생을 만난다. 남학생은 홍주의 손에 들린 소화기를 바라보며 "그들은 책과 도서관을 좋아하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그런 짓을 하겠어요? 안 그래요?"라고 반문하지만 홍주는 생각이 다르다. 홍주가 생각하기에 그들의 분노는 단지 도서관의 책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리고 며칠 뒤 도서관에 화재가 발생한다. 혼자 어두침침한 도서관에서 『밤의 가스파르』를 읽던 남학생은 자취를 감춘다.
세계의 항상성을 지키는 수호자들
일곱 편의 소설을 미완으로 가지고 있는 해미는 글을 쓰기 시작했다고 나에게 말한다. 학교도서관 방화는 다행히 책상과 의자 몇 개가 탔고 교실 쪽 벽면의 마감재가 그을린 정도로 끝난다. 해미나 홍주의 격렬한 불안이 극단적이고 폭력적인 결과로 이어지지 않은 것은 그들의 불안에 무탈을 소망하는 작가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얹은 탓인 듯하다. 예상할 수 없고 준비할 수 없는 불확실성이 낳은 불안을 마주하는 작가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나(「손님」)와 홍주는 흔들리는 세계를 안정화하고자 애쓴다. 딸기맛 사탕을 입안에서 굴리는 홍주, 학교도서관들의 실태를 바꾸고 싶지만 책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에 차마 책을 태우지 못하는 가스파르는 세계의 항상성을 지키는 수호자들이다. 눈앞의 타자를 온몸으로 사랑해 마지않는 이들에 의해 세계는 결코 유의미하게 파괴되지 않는다. _「해설」에서
저자소개
지은이: 명학수
2018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하며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나는 친구네 집에 놀러갔다』 『말의 속도가 우리의 연애에 미친 영향』 등이 있다.
목차
손님
밤의 가스파르
해설 : 동조자의 사랑―사랑해 마지않는 나의 파괴자에게 _전승민(문학평론가)
작가의 말